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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험 치지 않을 권리
시험 치지 않을 권리
2008-12-24 (Wed) 마을지기 [2008-12-26 09:49]
전대환 내일신문
기사입력 2008-12-24 13:24
[내일신문]
전대환 (대구참여연대 공동대표 구미 안디옥교회 목사)
고등학교 1학년 때였다. 겨울방학인 1월에 학교에서 학기말 시험을 친다고 했다. 담임선생님을 찾아가 이렇게 말씀드렸다. “선생님, 방학기간은 수업일수에 들어가지도 않는데, 방학 때 시험을 친다는 것은 부당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저는 이번 시험을 치지 않겠습니다.”
선생님 표정은 순간적으로 일그러졌다. 며칠에 걸쳐 설득과 항변이 오간 끝에 선생님은 감사하게도 시험거부를 ‘묵인’했다.
그해 1월 어느 날 나는 시험을 치지 않고 강원도의 친척 댁으로 ‘체험학습’을 떠났다. 그 뒤에 받은 성적표에는 국어 수학 영어 등 전 과목이 0점이었고 학급석차는 61명 중 61등이었다.
그 일로 인해 2학년에 올라갈 때 나는 이른바 특별반에 들지 못해서 한해 동안 선생님들로부터 찬밥 대접을 받아야 했다. 군사정권의 서슬이 시퍼렇던 유신시절, 학생이 학교의 방침을 거부한다는 것은 감히 상상하기 힘든 일이었지만 그런 일이 있었다.
당시 나는 ‘시험을 치거나 치지 않거나 하는 것은 학교의 선택사항이고 시험에 응하거나 응하지 않거나 하는 것은 나의 선택사항’이라는 생각을 가졌다. 시험을 치지 않은 대가로 0점 성적표를 받아 들었다. 그걸로 이야기는 끝이다.
전과목 0점, 학급석차 꼴등
학생이 시험 치기 싫어서 안 친 것이고, 학교는 전 과목을 0점 처리했으면 된 것 아닌가. 어제 전국적으로 치러진 중학생 일제고사를 ‘거부한’ 사례가 있었던 모양이다. 교육당국에서는 ‘엄정한’ 대처를 벼르고 있다고 한다. 뭐가 문젠지 모르겠다. 시험 치기 싫어서 치지 않겠다는데, 뭘 엄정하게 대처한다는 말인가.
시험 치지 않은 학생들의 성적을 0점으로 처리하면 그걸로 되는 것 아닌가. 시험에 응하지 않은 학생들을 ‘무단결석’으로 처리하겠단다. 정 그렇게 하고 싶으면 하면 된다. 그런데 학생이 무단결석을 했는데 교사에게는 왜 중징계를 하는가. 회사에 무단결근을 하면 사장이 중징계를 받아야 하는가. 교인이 교회에 무단결석을 하면 목사가 중징계를 받아야 하는가.
‘시험 거부’라고 거창하게 표현해서 그렇지, 시험 치기 싫어서 치지 않았다는데 무슨 명목으로 누구를 징계하겠다는 것인지 모르겠다. 백보 양보해서 설령 교사가 잘못했다고 치더라도 이런 논리를 쓰자면 교육감이나 교육부장관이 징계를 받아야지, 왜 교사가 징계를 받는가.
교육당국에서는 시험 날에 ‘체험학습’을 허락했다는 ‘죄목’으로 교사와 교장을 징계하겠다고 하는 모양인데 그것도 우습다. 학생과 학부모는 교육 소비자이기도 하다. 소비자는 물건을 살 권리도 있고 안 살 권리도 있다. 시험을 칠 권리도 있고 치지 않을 권리도 있다.
시험날 체험학습을 떠나겠다는데 허락하지 않을 권리가 교사에게 있는가. 하긴 ‘무단결석’으로 처리하지 않은 ‘죄’를 물을 수는 있겠다. 그러나 언제부터 교사들이 이런 판단을 내리는 데 교육부장관이나 교육감의 결재를 받아야 했는가.
선택의 기회 박탈은 ‘가혹행위’
서울시 교육청 한 관계자는 “시험 거부를 유도하는 것은 성적 조작과 같다”며 “지난 10월 일제고사 거부를 유도한 교사에게 내려진 것처럼 중징계가 내려질 것”이라고 말했단다.
글쎄, 교사들이 어떻게 ‘유도’했는지는 모르지만 우리나라 학부모들이 유도한다고 유도당하는 바보들인가. 그리고 체험학습도 학습이고 시험도 학습이다. 교사가 소비자인 학생과 학부모에게 선택의 기회를 준 것이 왜 잘못인가.
하기 싫다는 것을 억지로 시키는 것은 ‘가혹행위’다. 가혹행위를 피하겠다는 사람을 궁지로 몰아넣는 것은 폭력배들이나 하는 짓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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