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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세기와 종교
21세기와 종교
1997-03-25 (Tue) 전대환 [2004-09-27 23:26]
전대환 KBS 제1라디오
황석영 선생이 쓴 장편소설 {장길산}에 보면 <사자암>이라는 조그마한 외딴 암자에서 허름하게 살아가는 한 승려가 나옵니다. 주인공인 장길산이 참수당했다는 소문을 듣고, 길산을 사랑하던 묘옥이란 아가씨가 길산의 넋이라도 위로해 줄까 하여 시체가 내버려진 곳을 찾아가다가 사자암의 스님을 만났습니다. 사랑하는 남자가 화적으로 몰려 참수당했다는 묘옥의 이야기 끝에 스님은 이런 말을 합니다.
"설령 화적질을 했다손 치더라도 별 죄될 것두 없소이다. 먹지 못해 굶어죽는 죄가 더욱 크지요. 나도 가끔 도적질을 합니다... 우리네는 신선과 달라서 소나무 껍질이나 풀뿌리를 캐먹고 학을 타고 다니지를 못하지요. 그렇다구 도학하는 선비처럼 글로 끼니를 때우지도 못합니다. 밭을 일구어서 곡물도 내어먹지만 하도 척박하니 농사가 제대로 되어야지요. 그래 가끔씩 성내 부잣집을 찾아가 도적질을 한답니다. 재물이 많은 자들은 그것을 잃을까 염려하여 우리네보다 근심걱정이 많으니까요. 그만큼 신심도 깊지요. 신심이래야 별게 아니라, 물건인 부처님 상이나 부적 따위들에 꼼짝 못하는 것입지요. 소승은 주로 부적을 그려 팔기도 하고 주역도 보아줍니다. 이것이 도적질이 아니라면 무엇이겠소. 내 양식감만 조금 남기고는 모두 해남골서 조개 줍고 사는 가난뱅이들께 나눠주는데... 시주 받아 대들보를 올리고 기와를 얹어 찬란한 금불상을 들어앉힌 절을 지어 무엇 하겠소이까. 다 도적질 밑천을 장만하는 것이지요." 어떻게 보면 참으로 충격적인 내용입니다.
종교란 무엇이겠습니까? 인간의 한계를 극복하기 위한 한 대책이 아니겠습니까? 세상살이에서 시시때때로 한계에 부딪친 인간들이 그 한계를 넘어서 보겠다고 하여, 절대자 혹은 초월자를 찾는 현상이 종교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개인>의 문제점만을 해결하려고 하는 일종의 이기주의입니다. 내가 지금까지 애써 모아놓은 재산을 잘 보존해야겠다는 생각, 건강하게 살아야겠다는 욕망, 이 세상에서 누리던 부귀를 죽음 이후에도 계속 누릴 수 없을까 하는 염려 등 지극히 개인적인 복락만을 위해서 종교를 찾는다면 그야말로 아전인수(我田引水)가 아닐 수 없습니다.
오늘날의 우리 사회에서도 절간의 대들보와 기와지붕이 찬란해지고, 교회의 종탑이 높아만 갑니다. 고통 당하는 신도에게 염불을 외워 주고 기도를 해 주는 것으로 종교가 제 역할을 다한다고 생각하지는 않는지 모르겠습니다. 또한 교회나 사찰의 거대한 예산 중에서 불우이웃 돕기 성금 몇 푼 내는 것으로 사회에 공헌을 하고 있다고 착각하고 있지는 않은지 모르겠습니다.
<사자암> 스님 이야기가, 전해져 오는 이야기인지 아니면 작가의 순수한 창작인지는 모르겠으나, 종교가 도적질일 수도 있다는 말은 우리에게 도전을 주는 내용임에 틀림없습니다. 21세기를 앞둔 이 시점에서, 우리는 종교의 본질을 다시 생각해 보아야 할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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